이슬람교 Up Z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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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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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Up
이슬람교
이슬람교에 대한 글입니다. 이슬람교에대한이해1
일찍부터 아라비아반도에는 사막의 유목민(베두인)과 오아시스 정착민으로 구성된 이중적 사회구조가 있었다. 가부장적 혈연관계로 얽혀 있는 유목사회는 느슨한 정치구조와 집단주의 의식으로 유지되었다. 부족사회 성원들은 집단의 대표자를 뽑아 질서를 유지하며 나름대로의 사회생활규범을 지켜나갔다. 황망한 사막환경에서 개별 행동은 죽음을 자초하므로 자연히 집단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방목지나 수원지 등 사회적 부(富)에 대해서 공유 관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부족사회적인 행동과 의식은 후일 이슬람교 교리와 이슬람문명에 잠재적으로 반영되었다.
유목민들과는 달리 오아시스 정착민들 속에서는 급속한 사회 • 경제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특히 사산 조 페르시아와 서쪽의 비잔틴제국간의 장기적인 대결로 말미암아 페르시아에서 메소포타미아를 경유해 지중해로 통하는 실크로드가 차단되면서부터 아라비아반도 서부의 홍해 연안지방이 주요한 교역통로로 떠올랐다. 이러한 통상의 요로에 위치한 메카나 메디나에는 교역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활동이 활발해져 부의 축적과 더불어 사회적 분업도 생기고 유목민과의 유대도 강해졌다. 그리하여 전래의 이중적 사회구조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해 빈부의 차가 생기고, 사유(私有)에 기초한 경제권을 추구하면서 쟁탈이 불가피해졌다. 무역권이나 대상로(隊商路)를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은 비일비재했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유년시절에 해당하는 575년부터 590년 사이에 발생한 네 차례의 유혈적 상권 쟁탈전이 그 일례다. 이러한 사회 • 경제적 변화로 인해 혈연에 기초한 씨족제도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고, 종래의 씨족적 평화나 평등 및 선린관계에 바탕을 두고 수평적으로 결성된 사회조직은 원추형(圓錐形)의 계층적 사회구조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결국 사회 • 경제적인 변화는 내부 의식구조의 개편을 필요로 했고, 이에 부응하여 생겨난 것이 바로 ‘이슬람교’이다.
3.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고도 메카의 명망 있는 꾸라이쉬 부족의 하쉼 가문 출신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는 유대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하녀 하갈 사이에 태어난 이스마엘의 후손이다. 우리가 아랍민족과 유대민족 간, 이슬람교와 유대교 간에 역사적인 친연성이 있다고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코끼리의 해’(에티오피아군이 코끼리를 몰고 메카에 침입한 해)인 570년 4월 22일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어머니마저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 낙타몰이꾼으로 대상에 참가해 북쪽 시리아 지방을 자주 내왕하면서 기독교를 비롯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미래의 꿈을 키워갔다. 25세에 15세 연상인 부유한 과부 카디자와 결혼한 후 생활이 안정되자 메카 부근의 히라동굴에 들어가 명상과 사색에 잠겼다.
[문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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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목 : 이슬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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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이슬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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